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무제
엄마 팔을 못 쓸 일이 생겼다. 어제 밤에 더러워진 내 새 흰 신발을 빨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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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우나
습식사우나에서 몰아쉬게 되는 숨은 울 때 쉬는 숨 같았다. 오래 전에 눈물이 마른 나는 그래서 용산역에 갔다가 기차 대신 눈에 띈 그 사우나 건물로 들어간 건지도 모른다. 몸을 참을 수 없는 열기에 둘러싸이게 하고팠는지도 모른다. 뻑적지근함 속에서 자연스러운 절박함이 부풀어올라 마른 주름을 펴낸다. 더워진 피와 뜨거운 수증기는 하나의 큰 흐름이 되어 경계를 없애 공간 전부가… 더 보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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두더지쥐 무용담
커다란 크레인은 누구의 집을 짓느냐 또 그 추잡한 두더지쥐들의 굴이 되어가느냐 쥐들은 럭셔리를 태양으로 삼아 뜬 눈으로는 처다볼 수 없는 것을 굽는다 취한 것은 반칙인가, 심판에게 들키면 처벌받는가 킁킁거리는 코 빼꼼 내밀어 나의 머리 속 과일을 파먹지 말아라 그러면 그 부위 도려내겠다 그 누구의 무용담도 결코 무용담이 아니다 면죄부는 더더욱 아니다 결실이 아니다 무용담은 필시… 더 보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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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정문
고정문이 비극적인 이유는 분명 문인데 열리지 않고, 열리지 않게 해놓았고, 더 이상 문이 아니게 만들었지만, 그럼에도 문이어서, 허락만 된다면 언제라도 다시 문으로서 열 수 있기 때문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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서울역 광인
그 광인은 매일 서울역에 오더라. 대기소에 앉아있는 모두에게 들릴 듯이 큰 목소리로 깔깔깔 웃거나 주저리주저리 혼잣말을 하고 어떨 땐 쉬지 않고 욕지거리를 한다. 옷차림도 상당히 독특하게 괴악해서 한 번 본 사람은 다음 번에 서울역에 왔을 때도 그 광인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. 광인은 하루 일과인 마실 장소로서 서울역을 선택한 것일 터이다. 우선 광인과 행인은 쌍방으로… 더 보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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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랑만으로
사랑만으로 다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, 라고 하기엔 사랑하지 않는 쪽이 얼마나 더 강한지를 너무 잘 알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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달력
달력의 정중앙에서 길을 잃었다 앞도 뒤도 크고 딱딱한 벽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끌려가는 여행이 마음을 구해줄까 아니면 오히려 흰색 우물 내벽 밖에 보이지 않아 안으로 가라앉을 수 밖에 없을까 그 속을 두려워하게 됐을 때 진짜로 두려워해야 하는 곳으로 보내졌다 달력의 정중앙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 기뻐하기만 할 수 있을까 꽃이 필 수 없는 땅이라고 여겼던… 더 보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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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대로는
이대로는 안 된다. 이대로는 안 된다, 라고 몸 속에 흐르는 것이 마찰음을 낸다.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낀다. 그러나 이대로는 이대로여야 한다. 이렇게, 이런 전제로 시작함을 용서하소서.그치만 이 전제란 바탕에, 아니 그 유리 밑에 깔린 채 없을 수 없다. 마커로 덧칠하는 것은 그 유리 위에 겹치는 가벼울 뿐인 의미.고통이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. 고통은 유리 밑에… 더 보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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둥글게
그저 둥글게 마음을 감싸고 코너에서 튀어나오는 놀라움 없이 그저 깨끗하게 윤이 나게 돌을 닦고 말하지 않고 그래서 부딪히지 않고 부딪힐 일 없이 그저 행복하게 오래오래 쭉 행복하게 편히 쉬는 거야 푸른 잔디와 나무로 지은 작은 집들 넓은 등 늙은 나무와 파도 없는 호숫가에 나와 싸우지 않고 수영하는 사람들 각자의 껍데기 속에 겨울잠 웅크린 채 깨지는… 더 보기
旅人